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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텔의 사과

by 무지개세상 2019. 1. 26.

14세기 초엽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엇다. 중앙집권적인 강대국의 강압 정치와 이에 속해 있는 약소국의 저항을 보인 전형적인 관계에 있었다.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의 횡포와 거만은 특히 더했다.드디어 스위스의 민중은 참다못해 폭동울 일으켰는데,게슬러는 그 지도자를 처형한 뒤에 오스트리아 공(公}의 모자를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지나는 행인들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 햇다. 스위스의 활의 명인으로 알려진 빌헬름 텔이 여섯 살 먹은 자식을 대리고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그는 모자를 햘해 절을 안했다는 이유로 붙들려서 앞으로 끌려 나왔다.빌헬름 텔을 그 전부터 게슬러가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게슬러는 빌헬름 텔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텔에게 화살로 맞추라고 명령 했다.그러나 게슬러의 잔인한 시험은 성공 하지 못했다. 텔의 솜씨는 아들을 다치지 않고 사과만 맞추어 떨어뜨린 것이다.그런데 그 순간 텔의 사타구니 속에 감춰 두었던 또 하나의 화살이 떨어졌다. 그 화살은 무엇이냐? 게슬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텔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사과를 맞추지 못했을 때에는 제2의 화살로 당신을 쏘아 죽일 작정이었다. 게슬러는 텔을 결박하여 배에 태우고 루째른 호반에 있는 감옥에 보내 죽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 하려 햇다. 게슬러는 몹시 겁이나서 배의 조정에 능숙한 텔을 결박에서 플고 풍랑을 벗어나게 했다.배가 무사히 호반에 도착 하자 텔은 육지로 뛰어올라 게슬러를 활로 쏘아 죽였다.이것이 봉화가 되어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여러 번 예술화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실러의희곡 빌헬름 텔 과 이탈리아의 작곡가 롯시니의 가곡이 유명 하다.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활로 노려야 했던 단지궁술의 과녁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상징으로 높여진 것이라 할 것이다.근대적인 눈으로 본다면 그 사과는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텔은 아들의 생명을 걸어야 했다.그 어린 아들은 단지 텔의 자식이라는 점을 넘어서 스위스의 다른 세대를 상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즉 독립운동의 윤리가 명석한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유럽의 문화를 낳게 한 네 개의 사과란 말이 있다.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경계를 듣지 않고 낙원을 쫒겨나게 된 금단의 열매도 사과였다.둘째는 세 명의 여신의 불화로 인하여 트로야 전쟁을 이르키게 한 파리스의 사과 셋째는 뉴턴의 만류인력의 법칙에 암시를 준 사과 그리고 냇째가 이 빌헬름 텔의 사과다.첫 번째 사과는 헤브라이즘(Hebraism-기독교) 두 번째 사과는 헬레니즘(Hellenism-문예부흥) 세번째 사과는 근대 과학을 네 번째 사과는 근대 정치사상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면 유럽의 문화는 확실히 그 선(線)에 따라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