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자는 神을 활용 한다.
지난달 초입에 친구한테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늘 소탈하고 편안해서 내게 사람 만나는 기쁨이 뭔가를 깨우처 주는 좋은 벗이랍니다.그는 어머니뱃속에서 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단학 수련을 하는 나를 김 도사 라고 부르곤 했습니다.이 친구의 사연은 뙈나 심각한 것이었습니다.여보게 김 도사 엊그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들놈이 교회에 안
가겠다고 선언을 했네.이유를 물으니 예수님은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기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네.성질이 급해서 누가 싫은 소리만 하면 욕을 하든지 싸우든지 해야 속이 시원 한데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겠느냐는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자기 같은 나쁜 사람이 믿을 분이 아니라는 걸세.친구는 아들놈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라고 했습니다.그것도 결정타를 맞은 기분이 들더랍니다.아들놈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네.솔직히 말하면 내 신앙이 부끄러워 젔네.내 기도는 늘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체 이루어졌거든. 이보게 김 도사 이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건가? 나는 그 동안 하느님을 모시기만했을 뿐 말씀대로 살지는 못한것 같네.
친구의 편지를 읽고 나니 얼마 전에 접한 어리석은 자는 神을 섬기고 지혜로운 자는 신을 활용항다.는 선가의 말쓴이 떠올랐습니다.나는 오래전 부터 세상에는 진리라는게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리와 만나기를 소망한다고 믿어왔습니다.그것은 미단 나 혼자만의 믿음은 아닐 터입니다.진리에 대한 소망을 선가에서는 인간에게 내재한 신의 속성!
즉 神性의 증거라고 말해 왔습니다.비단 선도 수련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사실 그런 믿음과 전제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그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지름길을 버려둔 체 돌아오는 먼길을 배워 온 것 갘습니다.내 친구의 고백처럼 신앙을 통해서 인간의 신성을 극진히 모시만 했을 뿐 우리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신성의 울림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종교의 힘은 놀라운 것이어서 자비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기도 했지만 오도된 신앙은 자기만의 신을 만들고 그 신만을 옳다고 움켜쥠으로서 싸움을 일으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류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선가에서는 분열의 시대에서 조화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 神人이라고 말해 왔습니다.신이 밝은 사람은 진리가 하나인 걸 알기때문입니다.하늘과 땅이 하나이고 너와 내가 하나인 걸 경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때는 모든 시비가 끝나고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될것이다.
성경에는 나는 길이요.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은 14:6)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 (요한복은 8:58)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 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에 따라 우리는 신앙인으로 머물 수도 있고 신인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예수님이 말한 나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가?
예수님이 목이 터져라 외쳤던 나 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그 때의 나는 자아이고 인간의 신성인 동시에 모든 생명이 존재하게 하는 우주의 원리이자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독생자 라고 말했는데 이것도 내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니 나만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정신을 강조한 것입니다.정신의 실체. 곧 진리는 오로지 하나이며 둘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이를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전 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노래했으며 우리민족의 3대경전의 하나인 천부경 에서는 무시무종 참전경계에서는 무소부재라 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두루 꽉 차 있다. 고 보았다.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사람 몸 속에 있는 하느님의 정신이야말로 현묘하고 완벽한 진리의 실체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신성을 확실히 알고 그것을 발현시킬 수 있는 원리와 방도를 제시한 것이 이 땅에 선도 문화였던 것입니다. 일류 역사 속에서 깨달은 모든 분들은 그 정신의 핵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며 그분들 삶 이전에 하나의 실체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정신이 신성이 숨쉬고 있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위대한 발견일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것이라고 여겨 체념하며 살아갑니다.간혹 하느님의 정신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정신은 무슨 주의네. 하는 관념일 경우가 많습니다.그런 관념은 시대에 따라.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이나 참 정신은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히 변질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성인들은 모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보다 먼저 자기안에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한 분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을 안내자로 따른믄 것입니다. 어떤성인도 깨달음을 종교적 교리와 동일시한 적이 없으며 그들은 진리를 자신의 몸으로서 자신의 감각으로서 체득할 것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도를 내 몸 밖에서 구하면 수천금을 주어도 이룰 수 없다고 했으며 소크라태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 했습니다. 공자님은 너의 몸속에 모든 법칙이 들어 있으며 너의 몸이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강조했습니다.우리의 몸을 통해서 우주의 진리가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음을 간파한 한 도인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심장의 고동 소리. 그 자연의 에너지를 느끼지 못하는 놈이 나는 언제 깨닫게 될가요 하고 묻는다면 돌장승이 애를 밸 때까지라고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에 진리가 약동하고 있으며 신성이 빛나고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用神의 출발점입니다. 신성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활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신의 의미를 알게 되면 왜 성철스님이 기독교인은 예수를 죽여라. 불교 신자는 부처를 죽여라 고 말했을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그때 가면 모든 종교는 인간 신성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 결국은 하나임이 분명해지며 그 평화의 한 마당에서 인류는 진정 하낙 될 수 있을 것입니다.원래 탁구나 배구를 처은 가르칠 때는 정석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그러나 기초 과정이 끝나면 탁구체를 이렇게 잡을 수도 있고 저렇게 잡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잘 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배우기만 할 것입니까? 이제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하느님의 마음을 모시기만 할 것입니까? 이제 모든 살아있는 가숨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우리도 스스로 빛나서 각자가 서 있는 삶의 이곳 저곳에서 신성의 빛으로 주위를 비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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