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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스크랩] `황혼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고...

by 무지개세상 2015. 10. 14.

 

 

‘황혼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고...

                                                                                                                                    강헌모

 

‘황혼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고 마음에 남는 것이 있어 글을 쓰게 되었다.

 

외딴 산 속 한 마을에, 노인을 제물로 바친 다음 먹어 버리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던 관습은 사라졌다. 이것이 발리섬의 전설이라는데 필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현실적으로 들린단다.

 

사회가 고령화되다 보니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 사회에서 따돌리며 소외 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자칫 우리도 노인들을 잡아먹고 제물로 바칠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발리섬의 전설은 노인들이 이해 타산의 희생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글을 대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소름이 돋는 일이지 않나.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인간은 정말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한량없이 나약한 존재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노인들이 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할망정 재물이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동물잡아 먹듯이 노인들도 젊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제물이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기겁할 노릇인가. 그와 곁들여 생각한 것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하느님께 절대 순명하여 귀한 외아들까지도 서슴없이 바친다. 그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모범을 보인 신앙의 아버지라 불릴만큼 믿음이 굳세다. 그런 믿음이라면 이 세상의 아무리 큰 고통도 다 이겨 나갈 것 같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들 이사악을 살려 주신다. 사람이 불에 타며 죽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처참하기 이를데 없어 같은 인간으로서 그런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느님 앞에서 심판 받아 지옥불에 떨어질때야 그런 화형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한다면 절로 고개 숙여진다. 사람이 생활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든지, 교만하게 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더냐.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부족해 토막까지 내는 사람들도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는 세상속에 살고 있다. 생명존중사상이 바닥으로 추락할만큼 추락되었지만 그래도 사람끼리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모두 힘써야 하지 않을까. 범죄는 계속 일어나겠지만 사회가 좀더 밝아지면 잔인한 범죄를 줄일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글을쓰는 나도 죄가 많고 한량없이 나약하다. 몇 년전에 수술대에 오르기전까지의 기다림의 시간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었나. 기가 팍 꺾이고, 풀 죽은채 있어야 하지 않았나.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이다. 사람이 살다 죽으면 구더기들의 차지가 된다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살아있을 때 존귀한 생명체이지 숨이 멈추고 나서는 짐승들의 밥이어서 인간은 참 불쌍하다. 그런 인간끼리 서로 앙숙이 되어 우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노인에게 요구되는 죽는 연습이 십자가를 받아 들임으로써 실현된다고 본다. 십자가 사랑을 연습하는 일이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죽음을 상상한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고 싶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맑은 정신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유언을 남기고 죽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상상도 놓아 버려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어떤 임종 봉사자는 용서하지 못해 쉽게 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인생, 모든 인간과 화해한 다음에야 비로소 평화롭게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모든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은 우리를 위협하는 삶의 최후만은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병이 들어 죽게될 때, “내가 왜 죽어, 그럴리가 없어. 아니야, 나는.” 하며 절망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죽음을 받다들이게 된다.

 

죽을때도 단계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의 사람에 비해 죽음을 잘 받아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죽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워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어차피 사람은 이 세상에 혼자와서 갈 때도 혼자 죽는다. 이점을 생각해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자.

 

사람이 결혼해서 살면서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죽을 때 가족이 보는 앞에서 눈을 감고 싶을거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다. 죽을 때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아무래도 가족이 아닐까. ‘나, 당신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소. 그리고 당신 때문에 장한 자녀들을 두게 되어 너무 좋았소. 주님께서 우리들을 가엾이 여겨 귀한 선물을 주시지 않았소. 당신은 나를 만나 없는 형편에 고생고생하며 힘들게 잘 견디어 왔지만, 어쩐지 당신에게 짐을 많이 떠 맡긴 것 같아 너무너무 미안하오. 너무나 당신에게 신세를 많이 졌소.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동안 당신에게 속상하게 하고 병들게 한 것들 모두 용서 하구려. 또 자녀들아 이 못난 아비를 만나서 무럭무럭 잘 자라주어 정말 고맙다. 너희 형제들간 협심해서 건강하게 잘 살아가길 바란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나는 먼저 죽지만 당신과 자녀들은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복해 주며 생을 마감한다면 더없는 축복이지 않을까.

 

그렇게 죽고 싶은데, 막상 죽음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주님의 손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형태가 여러 가지여서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죽은 사람이 있고, 잠 자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가 죽는 사람들이 있고,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불안전해서 ‘죽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불안해하고, 듣기 싫어하며 피하려 한다. ‘사람들은 막상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서 살아있을 때야 사람이지.’하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일이 죽은 다음에 마음쓰며 잘 하려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

 

황혼을 아름답게 살다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중년이 지나지 않았다 (중년을 60세까지라고 들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아픈곳이 있고해서 고심속에 살고 있다. 약기운으로 살때도 있는 것 같다.벌써부터 약기운으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 아프니까 서럽기도 하고 마음도 더 약해진 것 같다. 지금도 그런데 노인연령대에 살게될때는 어떨까? 지금보다더 힘없이 살게 될테고, 기력도 더 떨어질일이 아닐는지. 설령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마음만은 푸른 젊음으로 살고 싶다.

 

‘황혼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귀한 존재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어, 죽음에 대비하는 연습을 잘 하고, 노년을 행복하게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 4. 14.

출처 : 한국가톨릭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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