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필) 그리운 시절 / 문하 정영인
(수필 20151118)
< 그리운 시절 >
- 文霞 鄭永仁 -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도 그렇게 했고, 자식들도 그렇게 시켰지만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마치 결혼이라는 기획 상품이 한 시간마다 자판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젠 주례 없는 결혼식을 비롯하여 젊은 하객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오기도 한다. 신랑이 자축해서 축가를 부르기도 한다.
그저 축하금 내고 곧 바로 식당으로 가 한 끼 먹고 오는 인생 코스로 변모하고 있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잔치는 마을 전체의 잔치였다. 온 식구가 한 이틀쯤은 잔칫집에서 먹고 지냈다. 남정네는 채알을 치고 멍석 깔고 돼지 잡고 커더란 교자상을 놓았다. 여자들은 지짐개 지지고 전 붙이고 국수 삶고 국숫물 잔치국숫물 설렁설렁 끓였다.
혼사 축하금은 현물 위주었다. 누구 네는 막걸리 몇 동이, 감주 한 동이, 겨란 몇 줄, 국수 몇 관, 닭 몇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건 품앗이이었다. 그도절도 없으면 몸으로 땠으면 됐다.
가난했지만 정은 듬뿍 담겼다. 지금처럼 음식만 달랑 먹고 쪼르라니 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넓은 뒤란에서는 소당뚜껑 뒤집어 전 부치느라 야단이고, 눈치 빠른 엄마는 자기 아들 장독 뒤로 불러 감주 한 그릇 먹이느라 이 눈치 저 눈치를 본다.
아마 시골 혼사 집에서 가장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임시 셰프는 고방 담당 아줌마가 아니었나 한다. 그의 손을 거쳐 모든 음식이 나갔기 때문이다. 그 고방 총책은 아무나 시키지 않았다. 엽렵하고 재바르게 눈썰미 있게 칼질하고 디자인해야 했다. 그 마을에서 고방 책임자로 일할 수 있는 경력 담당자는 몇 안 되었다. 그중에 우리 엄마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 자타가 알아주는 고방 기술자였다. 고방 담당자는 내남적없이 어려웠던 시절, 잔치 음식을 얍삽하게 칼질해서 모자라지 않게 눈에 보기 좋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를….
그 총 고방 담당자 밑에는 몇 사람의 보조 담당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 과일 담당, 전 담당 등. 그러나 고기를 칼질하여 엽렵하게 내놓는 책임자는 늘 엄마였다.
그 바람에 우리 엄마가 어느 잔칫집 고방담당자로 간택되면,내 어깨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에게는 엄마 때문에 떨어지는 구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리비리하고 늘 을(乙)신세에 깍두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나에게도 비라리치는 친구들이 임시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국이 무상으로 주는 우유가루나 옥수수 가루를 타 먹거나 갱시기를 먹던 배곯이 하는 시절이었다.
잔치에 쓸 돼지를 잡는 날이면 으레 노인들과 아이들이 그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노인네들은 수퇘지 불알 구워서 호염(胡鹽) 찍어 막소주 한잔 마시는 즐거움이고, 아이들은 돼지 오줌보로 공차기하던 재미였다.
국수 담당 아줌마는 채반에 삶아 논 국수에 한뎃솥의 설렁설렁 끓는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잔치국수 내기 분주하고, 두툼한 손두부를 번철에 지지느라 야단이다. 구수하고 고소한 냄새가 고샅길을 타고 돌았다.
그래도 그날이 잔칫날이라 기중에 있는 입성 좋은 것을 입고들 나온다. 무명옷이나마 다듬잇살 오르게 다듬질하여 정갈하게 입고들 나왔다. 경사스런 좋은 날에 부정 타지 않도록…….
밤이 늦도록 남정네들은마당 멍석에서 술추렴하고, 여인네들은 신방 창호지문을 침 발라 뚫고 들여다보느라 부산하다.
그렇게 시골잔치는 무르익어 갔다. 처가지붕에는 박꽃이 새색시 얼굴처럼 하얗게 피고, 보름달은 휘영청 신방을 비추었다.
새색시를 보고서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든다. 수더분하다니, 엉덩이가 맵방석만 하니 애는 잘 낳겠다느니, 재바르게 생겼다든가, 웃음이 헤퍼 딸만 두겠다느니……. 암니옴니 미주알고주알 입방아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안방에서는 시어머니 자리가 며느리가 해온 혼수 자랑 바쁘다. 버선을 몇 죽 해 오고, 자기에겐 모본단 한 벌 해왔다는 둥.
대청마루에서는 짓궂은 신부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달기에 바쁘다. 빨래방망이로 신랑의 발바닥 용천혈을 마구 내리치니 신랑은 죽는다고 야단이다. 장모 자리는 사랑스런 사위 죽인다고 엄살하면서 푸짐하게 술상 내오기 바쁘다. 장모는 신랑이 술아 곯아떨어지면 첫날밤이 야단인지라 요리조리 사위에게 술 안 먹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떤다.
후행 온 신랑 작은 아버지는 장인 자리와 사돈 간에 젊잖게 맑은술 서너 잔 하느라 밤 가는 줄 모른다.
그렇게 시골 잔칫날은 살가운 동네 잔치였다.
코흘리개이던 나는 그 시절이 그립다.